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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조선 후기 왕들의 주요 무대는 창덕궁

여행 아웃사이더 2023. 3. 5. 21:32

목차



    경복궁은 조선 왕들이 업무를 처리하고 왕족들의 거처가 있는 중심지입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왕들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더 좋아했고 주요 무대로 삼았습니다. 돌과 건물들로 가득했던 인조적인 경복궁과 다르게 좀 더 조화로운 자연친화적인 창덕궁을 더 좋아했습니다. 창경궁은 바로 옆에 있는데 영조, 정조가 주로 지낸 곳입니다. 어떤 곳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 가는 길

    창덕궁은 서울 안국역에서 쉽게 갈 수 있습니다. 지하철로 이동할 경우 안국역 3번 출구 - 율곡로 - 돈화문, 차량으로 이동한다면 한남대교 - 남산1호터널 - 삼일대로 - 안국역 사거리 - 우회전 후 좌측 돈화문으로 오면 창덕궁을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돈화문을 지나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기념하는 기념 비석을 볼 수 있으며 조선 궁궐 중에 유일하게 지정받았습니다. 경복궁과 구조가 달라서 정전이 출입문에서 정면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정전으로 가려면 오른쪽에 있는 금천교 - 진선문을 지나서 왼쪽에 있는 인정문을 통해 갈 수 있습니다.

    인정전과 근정전 비교

    인정전 외관은 경복궁에 있는 근정전과 다르게 용마루 꽃무늬, 문들은 황금색인 것이 차이점으로 눈에 띕니다. 꽃무늬가 대한제국 황실을 의미하는 자두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왕실 가문인 전주 이씨 성이 옛 자두 이름 오얏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황제 색을 정전에 입혔기에 황금색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외관뿐 아니라 내부도 황금색으로 뒤덮여있으며, 서양식 건축양식이 조금씩 나타나있습니다. 서양식 창, 황금 커튼, 전등의 존재가 이를 증명합니다. 이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모습을 말해주는 것과 같기에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보고 있는 인정전은 순조 때 화재로 다시 지은 것으로 200년의 역사라지만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전소 되면서 대신 쓰인 곳이기에 조선 후기 역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 인정전입니다.

    희정당

    인정전 오른쪽에는 선정전이 있는데 이는 조선 궁궐 중 유일하게 청기와 건물입니다. 왕의 집무실로 사용된 곳이며, 그 옆에는 왕의 편전과 왕비 침전으로 사용된 희정당, 대조전이 있습니다. 경복궁이 남과 북으로 규칙적으로 있는 것과 다르게 인정전 동쪽에 특별한 형식이 보이지 않는 자유로운 배치가 되어있는 구조입니다. 이는 아무렇게나 막 배치된 것이 아니라 언덕배기 지형이라 이에 맞게 조화로운 배치가 되어있는 구조입니다. 희정당 입구를 살펴보면 전통적으로 알고있는 전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을 헐면서 재건되었는데 자동차에 내려 건물에 바로들어가도록 구조가 변경되었습니다. 아치형으로 깔린 블록들과 돌출된 지붕들이 특징입니다. 이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데, 조선 시대 본모습으로 복원하는 주장과 순종과 그 왕후가 머문 흔적을 그대로 놔둬야하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조전은 아직 공사중이라 그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궐내각사들이 2005년에 복원 후 개방되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궐내각사

    일제강점기 시절 헐렸으나 1991년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5년에 복원되어 지금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옥당은 홍문관을 의미하며 문서를 보관하고 학술 및 자문기관으로 사용되는 곳입니다. 이곳은 학식이 풍부하고 청렴한 사람들만 허락되는 자리였으며 고위직을 했던 관리들은 대부분 이곳을 거쳐갔습니다. 그 외 약방, 예문관, 규장각 등이 있습니다. 예문관은 조선 왕의 명령, 말 등을 담은 문서가 작성되는 중요한 기관이였으며, 규장각은 정조가 세운 왕실의 도서관으로 실제로도 주변에 책고 건물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규장각 도서는 일제강점기 시절 총독부에 의해 이관되어 있었으나, 후에 일부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낙선재, 후원

    세자가 머무르는 공간이었던 낙선재는 원래 헌종이 가장 사랑했던 후궁을 위해 지어진 곳으로 후사가 없어 비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이승만이 4.19 때 하야하면서 순종효황후, 덕혜옹주, 영친왕, 이방자 여사가 귀국하면서 거처했습니다. 그 이후 1989년에 이방자 여사를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후원으로 가면 연못 부용지와, 2층 누각으로 지어진 주합루를 볼 수 있습니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지었던 곳으로 규장각, 열람실로 이용되었습니다. 1층이 규장각, 2층이 열람실입니다. 창덕궁에 규장각이 2곳인 것이 의문일텐데 주합루의 규장각이 첫 공간이었으나 책이 쌓이면서 공간 부족으로 인정전 옆으로 이전하게 되어 2곳이 된 것입니다. 이곳은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많은 학자들이 활동했던 공간입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연못이 하나있는데 한반도처럼 생긴 특이한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승재정, 관람정이 마주보고 있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육각정 존덕정이 위치해 있는데 이는 인조 때 창건된 것으로 손상없이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안에는 현판 하나가 있는데 정조가 직접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가 걸려있습니다. 더 올라가게되면 고택이 하나 더 있는데 순조 아들이 순조와 어머니인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를 목적으로 지어진 연경당입니다. 보물 제 1770호로 지정된 곳으로 고종 때는 외국공사를 접견 및 연회를 베푸는 공간으로 사용됩니다.